빚이 무서워 통장도 못 보던 사람이, 제일 처음 한 일

빚이 무서워 통장을 한동안 못 보던 분들을 상담에서 자주 만납니다. 그런 분들이 회복을 시작할 때 처음 하는 일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. 대단한 계기가 아니라, 그동안 안 보던 것을 한 번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.


상담을 오래 하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. 회복을 시작하는 분들에게는 대단한 계기가 없다는 것입니다. 누가 손을 내밀어준 것도, 갑자기 돈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. 어느 날, 그냥 안 보던 통장을 한 번 열어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.

특별한 결심이 아닙니다. 그날이라고 뭐가 달랐던 것도 아닙니다. 그저 더는 안 보고 버틸 수가 없어서, 눈을 질끈 감듯이 열어보는 것입니다.

그렇게 숫자를 마주하면, 대개 생각보다 나쁩니다. 안 보던 사이에 더 불어 있으니까요.

그런데 그 자리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. 정확한 숫자를 보고 나면, 처음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합니다.

그전까지는 모든 게 막연합니다. 막연하니까 무섭고, 무서우니까 안 봅니다. 그러면 다음 날은 더 막연해집니다. 그렇게 막연함이 쌓이면, 나중에는 문제의 크기조차 가늠이 안 됩니다.

그런데 실제 숫자는 무섭긴 해도, 적어도 얼마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. 어디에 얼마가 있는지 아니까, 그제야 순서라는 걸 세워볼 수 있습니다.

제가 상담에서 자주 권하는 것도 그것입니다. 종이 한 장을 꺼내 어디에 얼마를 갚아야 하는지 적어보는 일. 다 적고 나면 대개 한 장이 채워집니다. 여전히 감당하기 벅찬 금액이지만, 한 장에 담기기는 합니다.

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며 사람을 짓누르던 것이, 종이 위에서는 몇 줄의 항목이 됩니다. 그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. 다만 그날부터, 매일 조금씩 그 종이를 들여다보게 됩니다.

그게 첫 걸음인 경우가 많습니다. 대단한 결심도, 극적인 계기도 아닙니다. 그냥 안 보던 걸 한 번 본 것. 막연하던 걸 적어본 것.

종이에 순서가 생기면, 그다음이 보입니다. 제일 먼저 연락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가 눈에 들어옵니다. 그때까지 모든 전화가 무섭던 분이, 순서가 생기고 나면 피하던 전화 중 하나를 먼저 걸어보기도 합니다. 통화는 길지 않습니다. 사정을 말하고, 언제까지 어떻게 해보겠다고 말하는 정도입니다.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면, 오랜만에 숨이 조금 쉬어졌다고들 하십니다. 피하던 걸 하나 마주했다는 것만으로 그렇습니다.

첫 행동이 꼭 통장인 것은 아닙니다. 어떤 분은 미뤄둔 고지서를 뜯어보고, 어떤 분은 오래 연락 못 하던 사람에게 “나 요즘 좀 힘들다”고 처음 말합니다.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. 그동안 피해오던 것 중 하나를 마주한다는 것입니다. 그리고 그 하나가, 다음 하나를 부릅니다.

그 뒤로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. 여전히 돈은 없고, 갚을 길은 멉니다. 그런데 하루의 결이 조금씩 달라집니다. 아침에 종이를 보고, 오늘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정하고, 그걸 하면 하루가 갑니다. 여전히 벅차도, 적어도 무엇을 향해 가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.

지금도 저는 그 자리에 있는 분들을 자주 만납니다. 통장을 못 열고 있는 분께, 오늘 당장 열어보라고 다그치지는 않습니다. 그 무서움을 아니까요.

다만 언젠가 열어볼 마음이 들 때, 그 옆에 같이 앉아 종이 한 장을 채우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. 첫 걸음은 늘 그 정도의 크기였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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